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30GP 사건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사건 발생 초기 국방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망자들의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하지 않았다. [[국군수도병원]]([[성남시]]), [[국군양주병원]]([[경기도]] [[양주시]])[* 육군 [[제6군단]] 28사단 지원 전방병원인 관계로 부상자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었다.], 국군일동병원([[포천시]], 현 국군포천병원), 국군벽제병원([[고양시]], 현 국군고양병원) 등 [[국군병원|군병원]] 4곳에 분산수용하였다. 이는 우연이 아니라 작정하고 이런 것으로 '''유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'''이었다. 심지어 국군양주병원의 경우 사건 당일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모여 있었기에 비무장 단독군장 차림의 기간병들을 내세워 유가족들의 병원 본관동 진입시도를 봉쇄하기도 했다. 그러자 당시 [[대한민국 국방부장관|국방부장관]]인 [[윤광웅]] 예비역 [[제독]]의 정책 보좌관이었던 정태용은 현안 업무를 조정하는 국방부 현안점검회의에서 "왜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해 합동분향소를 차리지 않느냐" 고 따졌다. 이에 인사복지 업무를 총괄하는 김승렬 차관보는 "군의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야 '''말썽'''이 안 난다"고 답변했다. 이에 빡친 정 보좌관은 "그게 말이 되느냐, 시신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안치하고 합동분향소를 차려 유가족을 지원해야 한다"고 주장하였다. 결국 정 보좌관의 노력으로 시신들은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지고 합동분향소가 안치되었다. --군 사정이 어쩌고 나발부는 이런 놈들은 정녕 미친걸까...-- 또한 1953년 국방부장관인 [[손원일]] 제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해군 출신으로 장관에 오른 윤광웅 장관 등은 분향소의 유가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국방부 간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분향소에 조문 갔다가 수십 명의 군인과 유가족, 언론사 취재진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거센 항의를 받았다. 평상시에도 '좌파정권에 투신한 좌파군인'이라거나 해군 출신이라며 국방부 내에 온갖 견제와 조롱을 받던 윤광웅 장관은 국방부 특히 육군 간부들에게 "그럴 줄 알았다"며 또 다시 조롱당했다. --조롱하는 놈들이야말로 똥군기에 젖은 똥별들의 무리인건 안비밀.-- 그리고 이것이 '''사상 최초의 국방부장관 조문'''이었다. 그동안 육군의 행태를 보면 구 [[일본군]]의 전통을 답습해 군대에서 사람은 [[소모품]]이라는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다. 사고로 죽었다고 쳐도 소대장, 중대장, 대대장, 연대장 보직해임해서 쫓아내고[* 어차피 간부도 소모품이니까.], 가혹행위 있으면 고참병 잡아다 감옥 집어넣고, 묵인한 간부 중 말단 몇몇 형사처벌하고, 유가족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. 누구 처벌했으니까 그만 아니냐는 것이다. 1996년 [[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]] 당시에도 17명의 [[대한민국 국군]] 장병들이 전사하였지만 시신들을 분산 안치해 개별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합동위령제는 아예 열지도 않았다. 합동분향소나 위령제가 없는데 대통령, 국방부장관 기타 등이 올 일은 만무하다. 그리고 위의 사건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랬으며 [[연평해전]] 당시에도 이와 같은 행태가 반복되었다. 결국 이렇게 합동분향소가 차려지게 되어 유가족들이 뭉치게 되자 유가족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생방송으로 중계된 수사상황 발표에서도 유가족들이 집요하게 의문점을 물어보게 된 것이었다. 이 과정에서 군부대의 실상이 드러났다. 유가족들을 따돌리려 하는 행위는 이 일 하나가 다가 아니었다. 군 관계자들은 장례 기간 동안에는 유족들을 매우 친절하게 대해 줬다. '무슨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하라'고 명함도 줬다. 하지만, '''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 번호를 해지, 연락을 끊어버리고 내뺐다.''' 이 사실을 알게 된 계기도 기가 막힌데,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입은 전투복이 보내지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긴 유족들이 부대에 문의하자 돌아온 답이 '피가 묻어서 태워버렸다.'였고 가족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함부로 그런 짓을 했다는 데 화가 난 유족들이 문제의 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돌아온 말은 "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"라는 안내멘트였다는 [[충격과 공포]]의 [[배신]]이었던 것이다.(...) 연락하라는 말은 말 그대로 말뿐이었다.(출처: [[당신이 혹하는 사이]]) 이 사건을 계기로 역대 총기난사 사건 등 국군의 주요 사고 사건들을 죽 정리한 2005년 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0&oid=047&aid=0000065715|기사]]를 보면 먼 과거에도 이런 사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. 불과 9일 뒤, 해군에서도 자칫했으면 이 사건보다 사상자가 더 컸을 뻔한 [[해군 동검도 제초제 사건|사건]]이 터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